최종 : 18/09/22 05:04



[今天歷史-1월12일] 애치슨 라인...이말 하며 저뜻 전하기

1950년 1월 딘 애치슨 미국 국무장관의 이른바 '애치슨 라인' 선언은 국제 관계에서 '이 말 하면서 딴 뜻 전하기'의 대표적 사례다.

애치슨 선언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장제스의 중화민국이 쫓겨온 대만 섬을 미국 방위선 밖에 둔다'라는 것이었다.

애치슨과 그 휘하 국무부 내 친마오쩌둥 반 장제스 성향의 '스틸웰 그룹'이 소련처럼 공산 볼세비키 세력이 아닌 민족주의적 공산 토지개혁 세려으로 간주한 공산중국 세력, 즉 중화인민공화국이 대만 섬을 접수하여 통일 중국을 이룩하는 것을 수용하겠다는 뜻이다.

한반도를 함께 대만 섬 밖에 둔 것은 미국 태평양 방위선이 한반도를 거치게 되면 지나치게 북쪽으로 올라간 것으로 지정학적 모양상으로 부자연스럽기 때문이었다.

아울러 장제스 세력을 포기한다는 미국 의도를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기를 살짝 피한다는의도에서 나온 것이지 한반도 안보 상황에 대한 고려는 핵심 포인트가 아니었다.

'메인 디시' 생선회 요리가 '중국'이고 '한반도'는 곁다리 요리 '스끼다시'였다.

그러나 이런 상차림의 숨은 뜻은 미국이 인식한대로 공산중국이 소련과 차별화하여야 한다는 것이었다.

미국이 대만 섬 접수를 막지 않을테니 공산주의자이면서도 민족주의적인 티토의 유고가 유럽에서 유고가 취햇던 것처럼 반소 자세를 취하며 소련의 팽창에 발목 잡기를 하라는 바람이자 주문이었다.

'공짜 점심은 없다'라며'윈윈 거래'를 압박하는 것이었다.

'공짜 점심 없다'에 대한 맞불은 '푸짐한 만찬'이었다.

미국의 선물투자 '풋 옵션'에 소련은 현물 거래로 중국에 막대한 이익을 안겨주었다.

애치슨 라인 발표 때 마오쩌둥은 모스크바에 있엇다. 그는 이오시프 스탈린의 '초대받지 않은 손님'이었다.

그러던 스탈린은 애치슨 라인 발표 직후부터 마오를 환대하기 시작했다. '문안 박대'에서 '유붕자원방래'의 귀빈 중 귀빈으로 바뀌었다.

스탈린은 애치슨 라인 발표 한달 뒤에 만주를 중국에 확실하게 넘겨주어 마오를 자신 쪽으로끌어들인 뒤 북한의 남침을 밀어붙였다.

미국이 애치슨 라인을 통해 연게시켰던 숨은 전제가 완전히 무너짐으로써 한반도에서 동서 열전이 벌어지게 된것이다.

그로부터 68년 뒤인 2018년 1월 '빅브라더들'의 '이 말하며 저 뜻 전하기'가 재연되고 있다. <스위프트-버크왈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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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10대 황제 同治帝 사망

1950년 1월 12일 = = 미국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아시아에서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애치슨 라인'을 언급했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 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이후 이를 '애치슨 라인'으로 지칭)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에 있는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전 수정주의론자 중에서는 '유발'이 아닌 '유도' 더나아가 '유인' 했다는 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주장은 소련 해채 후 한국전 관련 소련 측의 비밀 문서들이 공개 되면서 소멸됐으나 판단 착오에 따른 미필적 고의의 '유발 '비판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이와는 무관한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것은‘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전통적인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만 섬으로 쫓겨 온 국민당 정부를 보호하지 않겠다는 것이며 이는 그가 소련과 같은 볼세비키 정권이 아니라 토지개혁 정권으로 판단하는 '마오의 공산 정권'이 유럽에서 '티토의 유고'처럼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고수하며 소련의 팽창주의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엇다.

애치슨은 공산당도 국민당도 강하게 견지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 원칙의 주인공을 국민당 정권에서 공산당 정권으로 바꾼 것이다.

'애치슨 국무부'내 친중국공산당 성향의 이른바 '스틸웰 그룹'이 입안한 이 같은 중국 전략은 한국전 발발로 파탄이 났다.

중국 대륙의 변화에 미국이 '애치슨 라인'으로 '장군'하자 그 바로 한 달 이틀 뒤에 '스탈린의 소련'이 '중소우호동맹 상호원조조약'이라고 '멍군' 하며 응수했다.

이는 한반도에서 동서 진영의 제로섬 게임을 불러일으키고 말았다.

이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정신분열' 증상에 빠져 버렸다. 겉으로는 '하나'를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두 개'의 현실을 수용하고 유지하려 애썼다.

한국전에서 잠시 '하나의 한국'을 추진하다가 너무나 큰 비용을 강요당하게 되자 '두개의 한국'을 유지하는 선으로 후퇴했고 중국 대륙에서는 대만 섬을 '하나의 중국'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정하며 새로운 중국의 주인공이 된 공산정권을 무시하는 전략을 장기간 고수했다.

베트남에서도 한반도 상황과는 전혀 다른데도 불구하고 '2개의 베트남'을 무리하게 유지하였다.

'애치슨라인'의 '중국 대륙 구상'은 그러나 죽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사라지지도 않았다. 1972년 2월 리처드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미중화해로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났다.

[今天歷史-2월14일] 周恩來 방북,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 蘇 당대회

[今天歷史-2월21일] 닉슨 訪中, 傅作義, 譚嗣同, 흥중회

1875년 청 10대 황제 애신각라 재순(愛新覺羅 · 載淳)이 사망했다. 묘호는 목종(穆宗)이며 연호는 동치(同治)로 통상 동치제로 불린다. 1856년생으로 천연두에 걸려 사망할 당시 나이가 19살이었다.

1861년 불과 6세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생모 엽혁나랍(葉赫那拉)씨(서태후 西太后, 자희태후 慈禧太后, 나랍태후 那拉太后로 불린다)이 수렴청정했다.

정권의 실세였던 공친왕(恭親王) 혁흔(奕欣 동치제 숙부)은 ‘서양의 군대를 이용하여 반란군을 토벌한다(借洋兵助剿)'는 정책을 통해 1864년 십수 년 동안 지속되온 태평천국의 난(1851~1864 현 중국에서는 이를 태평천국 혁명으로 지칭한다)을 평정하고 이어 염군(捻軍), 회민(回民), 그리고 묘민(苗民)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로써 아편전쟁(1840~1842)과 태평천국의 난 등 외환과 내우에 시달렸던 청은 잠시 동안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한인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과 좌종당(左宗棠) 등이 요직에 등용되어 정치의 실(實)을 거두어‘동치중흥(同治中興, 1861~1874)'으로 불리는 안정된 치세를 이룩하였다.

이 기간 중 지방권력이 강화되었고‘양무운동(洋務運動)'을 통해 서양문화를 수입, 군사, 과학, 통신 등의 여러 분야에서 근대화를 꾀하였다.

양무운동의 기본 이념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이었다. 주체적으로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겠다는 이러한 접근은 당시 동양 동북아 3국이 동일했다. 조선은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웠고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였다.

조선은 1863년 고종 즉위에 따른 대원군의 내정 개혁정치가 실시되었고 일본에서는 1868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 체제가 타도되고 왕정이 복고된 후 내정 개혁과 대외 정책 전환을 아우르는 유신(維新) 개혁이 시작되었다.

비슷한 시기 동북아 3국이 모두 위로부터 개혁을 시도했으나 '탈아론(脫亞論), 즉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보다 과감한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한 일본이 가장 앞섰으며 결국 일본은 조선을 병탄하고 중국을 위협하는 패권국가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2018/01/12 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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