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8/11/16 08:01



[今天歷史-7월11일] 북중 우호조약, 鄭和 대항해 출항

진나라 병마용 발굴, 세계 인구 50억 돌파,미국-베트남 수교,한국 최초 여류 비행사 박경원 일본 비행대회 입상, 한국 첫 여성 총리 서리로 장상 임명
1961년 7월 11일 북한과 중국이 베이징(北京)에서 군사동맹조약인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중국 명 : 中朝友好合作互助條約)'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이 해 9월 10일부터 발효됐다.

이 조약은 북한이 소련과 같은 성격의 동맹 조약을 맺은 뒤 5일만에 체결됐다. 당시 중국과소련 간에는 이념 분쟁이 최고조에 달할 때로 북한은 양국 사이에서 톡톡히 실리를 챙긴 것이다.

중국은 북핵문제로 인한 한반도 전쟁위기가 최고조에 달했던 1994년 6월 16일 이 조약이 "한쪽의 전쟁발발 시 다른 한쪽이 이에 자동 개입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밝혔다.

당시 중국 외교부 대변인 선궈팡(沈國放)은 외교부 정례 브리핑에서 북한과 중국 간에 맺은 1961년 조약에 따라 "북한에서 전쟁이 발발할 경우 중국이 자동적으로 개입하느냐"는 한국기자들의 질문에 대해 1961년 조약에는 "자동개입 조항'이 없다"고 답변했다.

선궈팡 대변인의 이 같은 발언에 대해 당시 한 소식통은 중국은 1961년 조약에 따라 중국이 전쟁에 개입하는 경우는 북한이 침략을 당하는 등 '정당성에 대한 명백한 침해가 있다고 판단 될 경우'로 제한한다는 입장을 미국의 군사 대표단에 여러 차례 밝혀왔다고 말했다.

선궈펑이 이 발언을 하기 하루 전인 1994년 6월 15일은 북한을 방문한 지미 카터 전 미대통령이 북한의 김일성 주석과 1차 회담을 가진 날이었다.

당시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유엔 안보리에서 북한제재 결의안을 추진 중에 있었고 북한은 이 결의안의 통과를 선전포고로 간주하겠다는 입장을 발표하였다. 또 사흘 전인 6월 13일에는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탈퇴를 선언하였다.

미국은 북한의 이러한 움직임을 심각하게 받아들여 미군 가족과 일반 미국인들에게까지 대피훈련을 실시하고 CNN은 대규모 취재단을 파견하는 등 한반도가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나중에 알려진 바로는 클린턴 행정부는 유사시 영변지역에 대한 북폭을 검토했었다.

마주 달리는 형국을 보이던 미국과 북한의 대결양상은 2차례에 걸친 김일성-카터 회담을 통해 북한이 6월 18일 핵동결을 약속하고 클린턴 행정부가 6월 21일 북미 협상 용의가 있다고 밝히면서 협상국면으로 급반전되었다.

김일성이 이처럼 유화적 자세로 돌아선 데는 중국이 북한-중국 우호협력 및 상호원조조약에 자동개입 조항이 없다고 공개적으로 천명한 것이 적지 않게 작용한 것으로 판단된다.

한편 북한 핵 위기가 남북정상회담 합의 등으로 확실하게 진정국면으로 들어가 있던 1994년 7월 8일 차오중화이(喬宗淮) 주북한 중국 대사는 북한이 공격을 받을 경우 중국의 자동개입을 천명한 북-중우호협력 상호원조 조약을 중시하고 있다고 밝혔다.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차오 대사가 평양에서 관리들과 만난 자리에서 지난 1961년 체결된 양국간 조약이 "아시아에 평화를 유지하는데 큰 효과가 있었다"면서 이같이 말했다고 전했다.

이 조약은 쌍방 중 한 쪽이 공격을 받게 되면 상호 군사력을 포함한 지원을 제공한다고 명시하고있다고 신화통신은 전했다.

북핵 위기가 최고조일 당시 선궈팡의 발언이 '병에 물이 반밖에 차 있지 않다'는 식이라고 한다면 핵 위기가 진정된 이후 차오의 언급은 '물이 절반이나 차있다'는 식이었다.

중국의 절묘한 조삼모사(朝三暮四)식 '언어외교'의 정수의 한 사례로 꼽힐만하다. 차오가 평양에서 이같은 '모사' 발언을 한 날은 아주 공교롭게도 김일성이 사망한 바로 그 날이다.
이날 새벽 김일성은 묘향산에서 심장마비로 급사햇다.
차오중화이가 발언할 당시 중국 측은 김일성이 사망한 사실을 몰랐다는 것이 공식적인 설명이다. 중국의 김일성 사망 발표 이전 이를 인지했는지 여부와는 별개로 중국은 김일성을 잃은 북한이 가장 필요로 한 때에 오비이락(烏飛梨落)격으로 가장 안심을 주는 발언을 한 셈이다.

선궈팡은 3차 6자회담에 중국 측 부대표로 참여했다.

1405년 7월 11일 명(明)나라의 삼보태감(三寶太監) 정화(鄭和)가 성조(成祖)의 지시에 따라 대 함대를 이끌고 양쯔(揚子)강 소주(蘇州)의 유가항(劉家港)을 출항, 1차 해외 항해에 올랐다.

정화는 1433년까지 모두 7 차례에 걸쳐 대항해의 이끌었다.

제1∼3차는 카리카트, 제4∼7차는 호르무즈를 최종 목적지로 했다. 한편 별동대는 아프리카 동쪽 기슭에서 홍해 연안까지 진출했다.

정화의 선단은 대형 상선(商船;길이 150m, 너비 62m) 60척으로 이루어졌으며, 승무원이 2만 명 이상이었다. 이 밖에 제6차와 제7차 사이인 1424년 그는 팔렘방까지 진출했다.

정화의 이 항해는 중국 역사상 최대의 항해였을 뿐만 아니라 세계 역사상에서도 유례가 없는 것이었다. 주된 목적은 정부가 직영하는 해외 무역의 촉진에 있었는데, 중국 국내는 물론 상대국의 사회와 경제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수행원의 저서인 『영애승람(瀛涯勝覽)』과 『성사승람』등으로 중국인의 동남아시아에 대한 지식이 생겼고, 화교가 진출하는 단서가 되었다.

본래 성이 마(馬)씨인 정화는 윈남(雲南)성 곤양(昆陽)주 출신으로 대대로 이슬람교도였다. 윈난이 명나라의 지배 하에 들어갈 때 붙잡혀서 환관이 되었다. 성조를 연왕(燕王)시절부터 섬겼으며, 그의 즉위와 함께 환관의 장관인 내관감 태감(內官監 太監)에 기용되었고, 정씨(鄭)씨 성을 하사받았다.

2차 鄭和항해... 중국의 아프리카 러시 2007/01/25 12:15

[書中一滴] 鄭和가 서양을 찾은 것이 개방 2005/07/11 23:36

鄭和 남해원정 600주년 범선 복원 2004/06/11 23:13

明항해가 鄭和 남극 최초 발견자 2004/03/29 21:57

1975년 = 중국의 고고학자, 산시(陝西)성 린퉁(臨潼)현에서 진(秦)의 병마용(兵馬俑)을 발굴.


[今天歷史-3월11일] 진시황 병마용, 李貞, 日 도호쿠 대지진
2004/08/25 20:39
세계사 속의 오늘

세계인구가 50억을 돌파했다(1987).

인도와 파키스탄이 국경지대에서 무력충돌을 일으켰으며(1981), 미국과 베트남이 종전 20년 만에 재수교를 했다(1995).

미국 매사추세츠공대(MIT)가 세계최초로 인공 생산한 피부를 사용한 이식 수술을 성공했다(1980).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한국 최초의 여류비행사 박경원(朴敬元 : 1901~1933)이 일본 도쿄(東京)에서 열린 비행대회에서 3등에 입상했고(1928), 첫 여성 국무총리서리로 장상(張裳)이 임명됐다(2002).

박경원은 32세 때인 1933년 만주국(滿洲國) 방문비행 도중 모국방문 비행을 하려고 출발했으나 시즈오카현(靜岡縣) 겐가쿠산玄獄山〕에서 짙은 안개로 인하여 애기(愛機) 청연(靑燕)과 함께 추락사했다.

한편 장상은 국회 인준에 실패, 최초의 여성 총리를 4년 뒤 한명숙에게 넘겨 주어야 했다.

서울대학교가 제 1회 졸업식 졸업생 215명을 배출했다(1947)

서울서 휴전반대 국민총궐기대회가 열렸으며(1951), 유엔군 공군이 평양과 사리원 일대를 개전 후 최대 규모로 폭격했다(1952).

국회가 포로에 대한 대우 등을 규정한 제네바협약을 인준했다(1966).



2018/07/11 06: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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