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3/26 06:57



[今天歷史-1월12일]애치슨라인, 淸 10대황제 同治帝 사망

[오늘의 단상-1월12일] 이 말 하며 저 뜻 전하기

1950년 1월 12일 = = 미국의 딘 애치슨 국무장관이 전미국신문기자협회에서 행한 ‘아시아에서의 위기’라는 연설에서 이른바 ‘애치슨 라인’을 언급했다.

애치슨은 태평양에서의 미국의 방위선을 알류샨열도-일본-오키나와-필리핀을 연결하는 선( 이후 이를 '애치슨 라인'으로 지칭됏다)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즉 방위선 밖의 한국과 대만 등의 안보와 관련된 군사적 공격에 대해 보장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애치슨은 이 발언으로 6개월 뒤 일어난 한국전쟁을 유발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한국전 수정주의론자들 중에서는 '유발'이 아닌 ''유도' 더나아가 '유인' 했다는주장까지 나왔다. 이런 주장은 소련 해채 후 한국전 관련 소련 측의 비밀 문서들이 공개 되면서 소멸됐으나 판당 착오에 따른 미필적 고의의 '유발 '비판은 사라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가 겨냥한 목표는 이와는 무관한 전혀 다른 데 있었다. 그 것은 ‘마오의 농민정권’을 유고화하자는 것이었다.

‘애치슨 라인’이 미국의 전통적인 대아시아 군사전략이었던 ‘도서방위선(島嶼防衛線) 전략’을 재확인하면서도 섬인 대만을 방위선 밖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그 의도는 누가 보아도 쉽게 판단할 수 있는 것이었다. 대만 섬으로 쫓겨 온 국민 정부를 보호하지않겠다는 것이며 이는 그가 소련과 같은 볼세비키; 정권이 아니라 토지 개혁 정권으로 판단하는 '마오의 공산 정권'이 유럽에서의'티토의 유고'처럼 강한 민족주의 성향을 고수하며 소련의팽창주의를 견제하는 기능을 하도록 유도하자는 것이엇다.

애치슨은 공산당도 국민당도 강하게 견지한 '하나의 중국' 원칙에 대한 다른 견해를 갖고 있지 않았으며 그 원칙의 주인공을 국민당 정권에서 공산당 정권으로 바꾼 것이다.

'애치슨 국무부' 내의 친 중국 공산당 성향의 이른바 '스틸웰 그룹'이 입안한 이대 중국 전략은 한국전 발발로 파탄이났다.

중국 대륙의 변화에 미국이 '애치슨 라인'으로 '장군'하자 그 바로 한 달 이틀 뒤에 ' 스탈린의소련'이 '중소우호동맹 상호 원조조약'이라고 '멍군' 하며 응수햇다. 이는 한반도에서 동서 진영의 제로섬 게임을 불러일으키고 말앗다.

이후 미국의 아시아 정책은 '정신 분열' 증상에 빠져 버렸다. 겉으로는 '하나'을 내세우지만 실제로는 '두개'의 현실을 수용하고 유지하려 애썻다.

한국전에서 잠시 '하나의 한국'을 추진하다 너무나큰 비용을 강요당하게 되자 '두개의 한국'을 유지하는 선으로 후퇴햇고 중국 대륙에서는 대만 섬을 '하나의 중국'을 대표하는 것으로 인정하며 새로운 중국의 주인공이 된 공산 정권을 무시하는 전략을 장기간 고수했다. 베트남에서도 한반도의 상황과는 젆혀른데도 불구 '2개의 베남'을 무리하게 유지하였다. '
'애치슨라인'의 '중국 대륙 구상'은 그러나 죽지 않앗을 뿐만 아니라 사라지지도 않았다. 1972년 2월 리처드닉슨과 헨리 키신저의 중소 미중화해로 기나긴 동면에서 깨어났다.

[今天歷史-2월14일] 周恩來 방북, 중소 우호 도맹 상호 원조 조약, 蘇 당대회

[今天歷史-2월21일] 닉슨 訪中, 傅作義, 譚嗣同, 흥중회
1875년 청의 10대 황제 애신각라 · 재순(愛新覺羅 · 載淳)이 사망했다. 묘호는 목종(穆宗)이며 연호는 동치(同治)로 통상 동치제로 불린다. 1856년 생으로 천연두에 걸려 사망할 당시 나이가 19살이었다.

1861년 불과 6세 나이에 제위에 올랐다. 생모 엽혁나랍(葉赫那拉) 씨(서태후 西太后, 자희태후 慈禧太后, 나랍태후 那拉太后로 불린다)이 수렴청정했다.

정권의 실세였던 공친왕(恭親王) 혁흔(奕?)(동치제의 숙부)은 ‘서양의 군대를 이용하여 반란군을 토벌한다(借洋兵助剿)’ 정책을 통해 1864년 십 수년 동안 지속되온 태평천국의 난(1851~1864, 현 중국에서는 이를 태평천국 혁명으로 지칭한다)을 평정하고 이어 염군(捻軍), 회민(回民), 그리고 묘민(苗民)의 반란을 진압했다. 이로써 아편전쟁(1840~1842)과 태평전쟁 등 외환과 내우에 시달렸던 청은 잠시 동안의 안정을 누리게 되었다.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두각을 나타낸 한인 증국번(曾國藩), 이홍장(李鴻章)과 좌종당(左宗棠) 등이 요직에 등용되어 정치의 실(實)을 거두어 ‘동치중흥(同治中興, 1861~1874)’으로 불리는 안정된 치세를 이룩하였다.

이 기간 중 지방권력이 강화되었고 ‘양무운동(洋務運動)’을 통해 서양문화를 수입, 군사, 과학, 통신 등의 여러 분야에서 근대화를 꾀하였다.

양무운동의 기본이념은 중체서용(中體西用)이었다. 주체적으로 서양의 선진문물을 받아들이겠다는 이러한 접근은 당시 동양 동북아 3국이 동일했다. 조선은 동도서기(東道西器)를 내세웠고 일본은 화혼양재(和魂洋才)였다.

조선은 1863년 고종의 즉위에 따른 대원군의 내정 개혁정치가 실시되었고 일본에서는 1868년 도쿠가와 막부(德川幕府)체제가 타도되고 왕정이 복고된 후 내정 개혁과 대외 정책 전환을 아우르는 유신(維新)개혁이 시작되었다.

비슷한 시기 동북아 3국이 모두 위로부터의 개혁을 시도했으나 '탈아론(脫亞論), 즉 '아시아에서 벗어나자'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보다 과감한 개혁을 강력하게 추진한 일본이가장 앞섰으며 결국 일본은 조선을 병탄하고 중국을 위협하는 패권국가로 성장하기에 이르렀다.


2019/01/12 08:42


경제| IT | 사회 | 정치 | 양안 | 문화 | 대만 | 홍콩 | 한중Biz | 한반도 | 인물동정

 
Copyright 2000 ChinaWatch.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