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6 07:52



[今天歷史-6월28일] 평화 5원칙, 鄧 정치 개혁 강조

일제 홍콩 봉쇄,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군 빌라서 출진, 유고 코민포름서 축출, 오스트리아 황태자 부부 피살, 코메콘 해체, 포드 자동차 2차대전 중 전투기 지프 등 군수물자 대량 납품, 베르사이유 1차 대전 강화조약 체결, 흑하사변, 한강 인도교 폭파

1954년 6월28일 = 중국 저우언라이(周恩來) 총리와 인도 자와할랄 네루 총리가 '평화 5원칙'을 발표했다.

평화5원칙은 ① 영토·주권의 상호존중 ② 상호불가침 ③ 상호내정 불간섭 ④ 평등호혜(平等互惠) ⑤ 평화공존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중국·인도 총리는 이 원칙을 양국 간에만 국한시키지 말고 모든 국가 간 원칙까지 확대시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버마(미얀마), 월맹(북베트남), 유고슬라비아, 아랍연합, 소련이 이에 찬동하였다.

이 원칙은 1955년에 있었던 '평화 10원칙'의 골자가 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1959년 8월 이후 중국·인도 간 국경분쟁이 일어나 인도는 1961년 12월 협정불연장(協定不延長)을 선언하였다. 중국은 평화5원칙을 대외정책의 지침으로 삼고 있다.

1986년 = 덩샤오핑(鄧小平)이 중앙정치국 상무회의에서 정치개혁 및 법치주의 개념의 강화를 강조하는 발언을 하였다.

그는 이 자리에서 개혁의 성패 여부는 최종적으로 정치개혁에 따라 결정된다고 말했다. 정치개혁 없이 경제개혁만을 하게 되면 개혁은 통(通)할 수 없으며 사람들의 저항을 받게 된다고 밝혔다.

그러나 덩샤오핑의 이런 입장은 대학생 중심의 자유화 요구 시위 여파로 1987년 1월 후야오방이 총서기직에서 해임되고 뒤이어 1989년 천안문 사태가 발생하면서 더는 표명되지 않았다.

1997년 2월 덩샤오핑 사후 정치개혁에 관한 덩의 구상은 중국 지도부 내에서 현재까지도 동면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있다.

1940년 = 일본이 홍콩에 대한 봉쇄를 선언했다. 항공로를 제외하고는 대륙과의 수륙 교통을 모두 폐쇄하였다.

일본의 홍콩 봉쇄가 선언된 바로 100년 전인 1840년 바로 이날 아편전쟁이 발발하였다.

중국은 아편전쟁으로 중국의 근대사가 시작되었으며 이때부터 반식민지 반봉건 사회로 진입하였다고 역사적 의미를 부여하고 있다.

일본의 영국 식민지 홍콩에 대한 봉쇄는 구 식민주의와 신 신민주의의 불안한 공존의 파탄이자 서양 제국주의 국가와 동양 제국주의 국가 간 이해관계 충돌이 마침내 수면 위로 부상했다는 역사적 의미를 부여할 수 있겠다.

세계사 속 오늘

미국 대통령 루즈벨트가 원자탄 개발 행정명령을 내렸다(1941). 이 계획의 미국명 암호는 '맨해튼 계획'으로 불렸다. 나폴레옹의 군대가 러시아 군대를 공격하며 빌나(현 리투아니아의 수도)로 진격했다(1812). 프랑스군 30만명과 동맹국 군대를 포함 총 64만명에 이르는 나폴레옹 모스크바 원정군 선발대는 빌나에 집결, 모스크바로 출진했다.

미국 포드사는 2차대전 기간 중 총 8600대 전폭기와 27만8000대의 지프 차량 및 5만7000개의 비행기 엔진을 제작하여 정부에 납품했다고 발표했다(1945).

이는 미국 대공황 탈출이 뉴딜정책의 효과라기 보다는 2차대전 발발에 따른 군수산업 활황을 중심으로 한 전반적 경제회복이었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구체적 자료의 하나다.

유고슬라비아가 소련에 대한 적대행위로 코민포름(국제공산당 정보국 : 소련이 2차대전 중 연합국과 통일전선 구축을 위해 1943년 해체한코민테른을 대체하여 1947년 창설한 조직)에서 추방됐고(1948), 소련을 중심으로 한 동유럽 공산권의 경제협력기구인 코메콘(COMECON)이 창설 42년 만에 해체되었다(1991).

실론 섬이 독립해 국명을 스리랑카로 명명했다(1976).

쿠바와 아르헨티나 법의학 팀이 볼리비아 발레그란데 인근에서 남미의 전설적 혁명가 에르네스토 체 게바라와 동료 5명의 유해를 발견했고(1997), 일본 JAL기 요도호를 납치했던 적군파 요원 다나카 요시미(田中義三)가 범행 30년 만에 태국 방콕서 일본으로 압송됐다(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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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수출국기구(OPEC)가 기준 유가를 59% 인상해 2차 오일쇼크가 시작됐다(1979).

오스트리아 페르디난트 황태자 부부가 사라예보에서 세르비아 청년에게 피살됐다(1914). 이 사건은 1차대전 발발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다. 5년 뒤 바로 이날 연합국과 독일은 베르사유 강화조약을 체결, 1차 세계대전을 공식적으로 종식시켰다(1919).

우리나라 역사 속 오늘

소련군이 연해주 이민시에 집결한 조선독립군을 무장 공격한 흑하사변(黑河事變, 일명 자유시 사변)이 발생했다(1921).

1920년 봉오동전투(鳳梧洞戰鬪)·청산리전투(靑山里戰鬪) 등에서 독립군이 일본군에게 대승을 거두자 일본측은 만주의 한국독립군을 완전히 소탕하기 위해 대대적인 토벌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는데, 이에 독립군은 전략상 부득이 노령(露領), 즉 소련 영토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 중 밀산(密山)에서 국경지대에 모인 독립군부대를 통합하여 대한독립군단이 탄생하였다. 이때 병력은 약 3500명 정도였으며 총재에 서일(徐一)을 비롯한 독립군의 중진이 총망라되어 행동 통일을 결의하였다.

1921년 2월 대한독립군단은 소련의 통제권이 완전히 미치지 않고 있던 노령자유시 일대에 주둔, 치타에 있는 레닌 정권의 완충정부와 공동작전 및 상호협조에 관한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에 소련의 원조를 받아 장비를 보강하여 본부를 이르쿠츠크로 이동·주둔하고 지청천(池靑天)을 교장으로 하는 고려군관학교(高麗軍官學校)를 개설하여 사관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이러는 가운데 일본과 소련은 베이징에서 캄차카 반도 연안의 어업문제에 관한 회의를 열어 어업조약을 체결하였는데 이때 일본측은 소련 영토 내의 한인 혁명단체 육성에 위협을 느껴 이의 취소를 요구했다.

반혁명 세력 진압에 골몰하던 소련은 일본과 충돌을 회피하고자 한국 독립군의 무장 취소를 일본에 약속하고 이에따라 21년 6월22일 한국 독립군에 무조건 무장해제의 통지를 내렸으며 이에 완강히 반대하는 독립군을 이중으로 포위하고 장갑차와 기관총으로 공격했다.

이날 참변으로 전사한 독립군의 수는 자료마다 다른데 ‘조선민족운동연감(朝鮮民族運動年鑑)’에는 사망 272, 익사 31, 행방불명 250, 포로 970명으로 기록되어 있다.

흑하사변은 상호 적대적이던 소련과 일본의 흥정에 의해 이루어진 비극이었다는 점에서 을사늑약 이후의
간도 협약
을 연상시킨다.

외무부가 청와대 도청사건과 관련하여 미국에 항의각서를 전달했다(1977). 국군이 서울을 북한군에게 함락당하고 후퇴하면서 한강 인도교를 폭파했다(1950). 컬러TV 송출 방식을 미국식인 NTSC식으로 최종 결정했다(1980).





2019/06/28 0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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