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10/19 12:30



[今天歷史-8월28일] 마오 重慶방문

국민당 비판 후즈 박사 징계국민정부에 요청,
,킹 목사 "I have a dream.", 세계 첫 라디오 상업 광고,북노당 성립,독도 분쟁, 민족일보 관련자 사형 선고


1945년 8월 28일 마오쩌둥(毛澤東), 저우언라이(周恩來), 왕뤄페이(王若飛) 등 공산당 대표단이 주중 미국대사 헐리와 함께 옌안(延安)에서 전용기편으로 충칭(重慶)에 왔다.

마오쩌둥은 40여 일 간 충칭에 머무르면서 장제스(蔣介石)과 회담했으며 10월 10일 정치적 민주주의, 군사력의 통합, 그리고 모든 정당의 동등한 법적 지위의 필요성에 합의한 '쌍십협정(雙十協定)’을 체결한 뒤 10월 11일 옌안으로 돌아가고 후속협상은 저우언라이가 맡았다.

‘쌍십협정’은 국민대회 또는 인민대표대회를 곧 소집하여 손문(孫文 : 쑨원)이 민주주의로의 전환에 선행된다고 말했던 정치적 훈정기를 끝내기로 했다.

국민정부는 ‘개인의 종교, 언론, 출판, 집회의 자유’를 보장할 것이며, 법의 집행을 적법하게 구성된 경찰과 사법부에 맡기고 ‘특무기관’들을 폐지하기로 약속했다.

지방정부 선거의 원칙에 대해서도 의견의 일치를 보았다.

하지만 이 같은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해 11월 중 만주 지역에서 국민당군과 공산군 간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이 와중에서 국민당과 공산당 간의 중재 역할을 해 온 헐리 미 대사가 사임하고 저우언라이가 옌안으로 철수하는 등 중국은 내전위기에 직면했다.

미국의 트루먼 대통령은 조지 마샬 장군을 특사로 파견, 중재를 시도하였으나 이는 내전의 본격적인 발발을 잠시 늦추는데 불과했을 뿐이다.

마셜 장군은 국공내전이 더 이상 되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닫고 있던 1947년 1월 자신의 중재 노력이 실패했음을 선언했고 미 국무부는 그달 말 10줄로 된 간략한 보도 자료를 통해 공산당과 국민당 사이를 중재하려던 미국의 마지막 연락대대가 해산되었다고 밝혔다.

앞서 헐리는 1945년 11월 말 트루먼 대통령에게 보낸 사직서에서 중국에 대한 미국의 민주주의적 이상은 공산주의와 제국주의 양 세력에 의해 위협받고 있다고 밝혔다.

아울러 그는 중국 주재 미국 외교관들이 국민당 정권의 붕괴를 막으려는 미국의 노력에 찬물을 끼얹고 옌안을 동정하여 중국 공산당에게 국민당군의 지휘 아래 그들의 군대를 편입시키지 말도록 충고한 것에 대해 강력히 비난했다.

헐 리가 비판한 이들 외교관들의 동조자들은 미 국무부의 정책 입안 부서에 다수 포진해 있었고 이들은 부패한 장제스 정권을 구원하는데 소극적 태도를 취함으로써 그들이 ‘토지개혁 집단’으로 간주한 공산당이 내전에 승리하는 것을 사실상 방조했다.

공산당의 승리가 확실시 된 1949년 8월 5일 이들은 ‘중국백서(白鼠)’를 통해 중국대륙의 적화가 전적으로 장제스 정권의 부패와 무능에 의한 것으로 규정하는 한편 마오를 아시아의 티토화 하려는 외교적 노력을 추진했다. 그 결과물이 1950년 1월 의 애치슨 라인이었다.

이들 외교관들은 장제스와 불화하여 2차 대전 중 중국 주재 미군 사령관 직에서 해임됐던 스틸웰(Joseph Warren
의 이름을 따 ‘스틸웰 그룹’으로 불리웠으며 매카시즘의 타깃이 되었다.

마오쩌둥은 그의 정치 일생 중 두 번의 중요한 협상에서 직접 전면에 나서 최종 승리를 거두거나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는 결정수를 확보했다. 그 첫 번째가 쌍십 협정이고 그 두 번째는 중소 우호동맹 상호원조 조약이엇다.
두 번 모두 전쟁 직후 상대방의 심장부에 직접 들어 가 자신이 요구하는 핵심적 요구를 얻어냇다.
쌍십협정은 1945년 8월 15일 대일전 승리 13일 뒤인 1945년 8월 28일 장제스의 국민정부 임시 수도 충칭으로 날아가 타결지었다. 소련과의 새로운 관게를 설정하기 위해 국공 내전 승리 직후인 1949년 12월 16일 소련의 수도 모스크바로 갓는데 베이징에서 중화임닌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지 2개월 보름 뒤였으나 중국 대륙에서의 국부군과의 전투가 아직 완전히 끝나지 않은 상태였다.

마오는 충칭서 두 달에 가까운 54일간 머물르면서 장제스와 회담을 가졌고 모스크바에서는 2개월하루 동안 있으면서( 중간에 베이징을 다녀왔다는 추정을 뒷받침하는 기록도 있다) 스탈린과 집접 협상을 한 것이다. '을'의 입장에서 '환영하지 않는 빈객'으로서 상대방을 압밝 하여 실리를 톡톡히 챙겨 국공내전의 승리와 중소 이몀분쟁 및 국경 분쟁에서 대등한 입지 확보를 예비했다.

1929년 = 상하이(上海) 국민당 시당부(市黨部)가 후즈(胡適) 박사가 손문의 사상과 국민당을 비판하는 글을 발표한 데 대해 후즈 박사를 징계할 것을 난징(南京) 정부에 요청했다.

세계사 속의 오늘

미국 인권지도자 마틴 루터 킹 목사가 워싱턴 D.C. 링컨 기념관 앞 광장에서 25 만 명이 참가한 가운데 흑인 인권요구 시위를 주도하였으며 비폭력 저항을 선언했다(1963).

킹 목사는 이 날 집회에서 "나는 하나의 꿈을 갖고 있다(I have a dream)"라는 감동적인 연설을 했다.

광장에 모인 청중 뿐만 아니라 많은 세계 사람을 감동시켰던 그 연설의 주요 대목은 다음과 같다.

"I have a dream that my four little children will one day live in a nation where they will not be judged by the colour of their skin but by the content of their character.

"I have a dream today.

"I have a dream that one day every valley shall be engulfed, every hill shall be exalted and every mountain shall be made low, the rough places will be made plains and the crooked places will be made straight and the glory of the Lord shall be revealed and all flesh shall see it together."

그는 그리고 평등권을 위한 투쟁은 “정의가 물처럼 흘러 넘치고 올바름이 힘찬 물줄기를 이룰 때까지 (Until justice rolls down like waters and righteousness like a mighty stream) ” 계속할 것이라고 말했다.

킹 목사는 1968년 백인 우월주의자에 의해 암살됏다. 그러나 그의 꿈은 그의 연설이 있은지 40년이 지난 2008년 미국 사상 처음으로 흑인인 버락 오바마 가 대통령에 당선됨으로써 실현되었다.

미국 뉴욕의 WEAF 라디오 방송이 세계 처음으로 첫 상업광고 방송을 내보냈다(1922). 광고료는 100달러였다.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조용수 사장 등 민족일보 사건 관련자 3명이 법원으로부터 사형선고를 받았다(1961). 한국과 일본 간에 독도 분쟁이 처음 발생했다(1952).

북조선 공산당이 북조선 신민당과 통합해 북조선 노동당을 창립했다(1946).

2019/08/28 07: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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