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10/19 12:30



[今天歷史-8월22일] 대만 한국과 단교, 鄧小平, 키신저

중국 공산당 국민정부 지도 수용 선언, 쑹메이링 대미 외교 활동, '크리스찬 군벌' 펑위상 사망, 파룬궁수련자 첫 사형 선고, 국제 적십자 조약 체결, ADB 발족, 한일합병조약 강제조인,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 학생 시위, 10차 북일 국교 정상화 회담

1992년 8월 22일 대만이 한국과의 단교를 선언했다.

대만 정부의 단교선언은 한국이 중국과 수교하기에 앞서 취한 것으로 정식 단교절차는 한국과 중국이 수교하는 이틀 뒤인 24일에 이루어졌다. 대만정부는 단교선언과 함께 한국-대만 항공노선을 폐쇄하고 한국에 대한 경제무역상의 특혜조치도 철폐한다고 밝혔다.

한국과 단교함으로써 대만과 수교한 아시아 국가는 하나도 없게 되었다.

추억...한중수교 당시 대만의 여러 표정들 2005/08/24 09:55

1937년 = 중국 공산당이 국민정부의 지도를 받아들인다고 선언했다.

공산당은
① 삼민주의(三民主義)의 실현

② 국민당 정권의 전복을 위한 모든 폭동정책과 지주의 토지몰수 정책 취소

③ 소비에트정책과 홍군 명칭의 취소

④ 국민혁명군으로의 개편과 국민정부 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를 것 등 4개항을 약속하였다.

이로써 국공 2차 합작이 성립되고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으로편제되었다.

8로군의 총지휘관은 주더(朱德), 부지휘관은 펑더화이(彭德懷)였고 산하에 115, 120, 129 사단 등 3개 사단을 두었다.

사단장은 각각 린뱌오(林彪), 허룽(賀龍), 류보청(劉伯承) 등이었으며 129사 정치위원은 덩샤오핑(鄧小平)이었다.

8로군은 나중에 정식으로 제 18집단군으로 개칭되었으나 계속 8로군으로 통칭되었다. 항일전쟁 뒤에는 신사군(新四軍)
과 합쳐져 인민해방군으로 개칭되었다.

1942년 = 장제스(蔣介石) 중국 국민정부 총통 부인 쑹메이링(宋美齡)여사가 미국 루스벨트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 미국의 대규모 원조를 얻어내기 위한 활발한 외교활동을 전개하였다.

2001년 = 중국이 파룬궁(法輪功) 수련자에게 처음으로 사형을 선고했다. 사교로 규정한 이후 첫 극형 선고로 동료를 살해한 죄가 적용되었다.

1904년 = 덩샤오핑(鄧小平)이 태어났다.

[鄧小平 100주] 추억(1)-덩샤오핑과 술래잡기2004/08/21 10:47

추억...1997년 홍콩과 덩샤오핑, 그리고 패튼 2004/09/24 05:41

추억...덩샤오핑(鄧小平)의 사망과 야근 2005/02/19 11:51

덩샤오핑, 암살 7차례 모면(조선) 2006.08.05 00:04 27'

<사진으로 보는 덩샤오핑의 일생>

[링크] 프랑스 유학 떠날 때인 14세 무렵의 덩샤오핑(사진)

[링크] 중일전쟁 당시 8로군 정치부 부주임겸 129사 정치위원으로 있을 때의 모습 (사진)

[링크]국공내전 당시의 덩샤오핑(사진)

(왼쪽에서 두 번째가 덩샤오핑. 세 번째와 네 번째가 각각 류보청(劉伯承)과 천이(陳毅)이다. 국공내전 3대 전투 중의 하나인 화이하이(淮海) 전선에서 촬영한 것이다.

[링크]유엔 특별총회에서 연설하는 덩샤오핑


[링크]1978년 12월 11기 3중전회 당시의 덩샤오핑(사진)

(덩샤오핑 왼쪽이 천윈(陳雲)이다.)

[링크]일본과의 화해(사진)

(오른쪽에 선 사람이 후쿠다 다케오(福田赳夫) 일본 총리)

[링크]백악관에서 카터와 함께(사진)

[링크]1979년 텍사스주 방문했을 때의 덩샤오핑(사진)

[링크]해방군 100만 명 감축을 발표하는 덩샤오핑(사진)

[링크]과학 기술 개혁은 생산력해방을 위해서다고 역설하는 덩샤오핑(사진)

(중앙군사위 확대회의에서의 연설 모습이다)

[링크]먼곳을 응시하는 말년의 덩샤오핑(사진)

1948년 = 중국의 유력한 군벌 중의 한 사람인 펑위상(馮玉祥)이 탑승하고 있던 흑해(黑海) 여객선에서 화재가 발생하는 바람에 사망했다. 1882년 생으로 향년 66세였다.

펑위상은 청군의 하급장교 가정에서 태어나 1902년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신군(新軍)에 참여했으며 1911년 신해혁명에 참가했다. 군벌 출신이었으나 손문의 혁명정부를 지지하였고 1928년 행정원 부원장 겸 군정부장을 지냈다.

그는 1930년 3월 옌시산(閻錫山)과 리쭝런(李宗仁) 등과 함께 반(反) 장제스 연맹을 구성하여 장제스와 대립하다 국민당에서 제명되었다. 1931년 만주사변 이후에는 항일 통일전선을 적극적으로 지지했으며 국민당에 복귀하여 1936년 1월 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을 지냈다.

종전 후 미국 방문 중 내전을 반대하는 반 장제스 성명을 발표하였으며 이후 해외를 떠돌다 공산당 주도의 인민정치협상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귀국하던 중 변을 당하였다.

기독교 신자로 민주화를 지향하였기에 ‘크리스찬 장군’으로 불렸으며 그의 부인 리더취안(李德全)은 1966년 중국 인민정치협상회의 부주석을 지냈다.

펑위상은 그가 베이징을 장악하고 있을 때인 1924년 11월 5일 황제 퇴위 후에도 자금성에 머무르고 있던 마지막 황제 선통제 푸이를 쫓아냈다.
이후 일본은 톈진에 은거하고 잇던 푸이에게 접근했고 결국 푸이는 일본의 괴뢰국 만주국의 허수아비 황제가 됏다.
세계사 속의 오늘

닉슨 미 대통령이 윌리엄 P. 로저스 미 국무장관의 후임으로 헨리 A. 키신저 박사를 임명하였다(1973).

로저스 국무장관은 닉슨-키신저라인의 미중 화해 추진과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되었고 1971년 키신저의 중국 비밀방문 당시에는 기자들의 관심을 돌리기 위한 바람잡이 역할을 하였다.

키신저 신임 국무장관은 국가안보 보좌관의 직책을 겸임하였다. 키신저 장관은 산하 직원이 1만 2,000명인 국무원과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를 모두 통할하는 전무후무한 막강한 국무장관이 되었다.

국제적십자 조약(제네바 협약)이 체결됐으며(1864) 아시아개발은행(ADB)가 발족됐다(1966).

우리나라 역사 속의 오늘

대한제국이 마지막 어전회의에서 한일합방조약을 승인했다(1910).

그러나 이 조약을 순종황제가 서명하지 않은 것으로 밝혀져 조약의 국제법상 정당성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고 강제적으로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한일합방조약이 아닌 한일늑약(韓日勒約: 勒約은 강제적으로 체결된조약이라는 의미다)으로 불러야 한다.

늑약은 전문 8개조로 되어 있는 데 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조선은 주권의 전부를 일본에 영구적으로 이양한다

- 일본은 조선 왕실을 존중한다

- 일본은 조선 외교대권을 통제하던 ‘통감부(統監府)’를 ‘총독부(總督府)’로 개칭하며 총독부는 일본 천황 직속이며 조선의 입법, 사법, 그리고 행전권력을 관장한다

이 늑약을 체결한 주역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李完用)과 일본 통감(統監)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였다.

조인 후, 1주일간 비밀에 부쳤다가 8월 29일 이완용이 윤덕영(尹德榮)을 시켜 황제의 어새(御璽)를 날인하게 하여 이른바 칙유(勅諭)와 함께 반포되었다. 이로써 8월 29일은 국치일이 되었다.

이미 1905년 을사늑약(乙巳勒約)에 의한 통감정치 이후 실질적인 통치권을 모두 빼앗은 일제는 국호까지 없애기 위해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런 움직임은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安重根)의사가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사살, 처단한 뒤, 일본 국내 여론의 지지를 받은 급진파들에 의해 표면화되기 시작하였다.

일제는 형식상 합법절차로서 친일매국단체인 일진회(一進會)를 조종, 100만 회원의 이름으로 한·일합병 상주문(上奏文)·청원서·성명서 등을 발표하도록 하여 한국인 스스로가 합병을 원하는 것처럼 날조하였다.

또 한국인의 반항을 억제할 목적으로 3대 통감에 임명된 데라우치는 이완용 내각과 절충하여 한국경찰권을 접수하였고 한국병합준비위원회를 설치, 합병 후 시행할 각종 제도·법령 및 한국 황제의 대우안 등 모든 준비를 완료한 뒤 본격적으로 한·일합병 공작을 폈다.

그는 1910년 8월 16일 이완용을 만나 합병조약의 구체안을 제시하여 의견 합치를 보고 정식으로 한국 각의(閣議)에 상정하여 내부대신 박제순(朴齊純), 탁지부대신 고영희(高永喜), 농상공부대신 조중응(趙重應) 등의 개별적인 승인을 얻고, 강력한 반대를 한 학부대신 이용직(李容稙)을 일본의 수해위문 특파대신 자격으로 강제 출국시켰다.

또 동의를 주저하던 궁내부대신 민병석(閔丙奭)과 시종원경(侍從院卿) 윤덕영을 설득해 동의를 얻은 뒤, 21일 밤 순종 황제와 태황제인 고종을 압박, 반강제적 동의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결국 다음날 순종 황제 앞에서 형식만의 어전회의를 거쳐 합병조약은 정식 가결, 조인되었다. 이로써 조선왕조는 519년 27대 만에 망하고(황제국이 대한제국으로 개칭한 때로부터 따지면 2대 13년. 이해 한양( 4대 문 안)의 인구 센서스에 따르면 조선인이 16만 명이었고 일본인은 2만 6천 명이었다.

한국은 1945년 8월 15일 광복 때까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전국 고교생 및 대학생 1만여 명이 한일협정 비준 무효화를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다(1965).

일본에서 제 10차 북한-일본 국교정상화 회담이 열렸다(2000).


2019/08/22 1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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