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 : 19/08/26 07:52



[今天歷史 6월23일] 클린턴 NMD 서명, 毋忘在莒

국민당군 공산군 전면 공격으로 국공내전 본격 시작, 한미 공군 수풍댐 폭격, 청불전쟁, 소련 한국전 휴전 제의

1999년 6월23일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국가 미사일 방어체제(NMD) 법안에 서명했다.

NMD는 1983년 1월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이 제창한, 속칭 ‘스타워즈’로 불리는 ‘전략방위구상(SDI)을 모체로 하고 있다.

SDI는 1991년 소련이 붕괴하면서 ’지구 규모 방위전략(GPALS)‘으로 대체되었는데 미사일 방어체제(MD)는 GPALS의 하나로써 대륙간 탄도 미사일에서 미국 본토와 동맹국을 방위하는 전략적 개념이다.

구체적으로 적국의 탄도 미사일이 발사되면 발사 순간부터 정찰위성과 이지스 함 등으로 추적, 요격 미사일을 발사해 격추시킨다는 것이다.

미국이 이런 전략을 추진한 배경에는 냉전 종식 후 이란, 이라크, 리비아, 북한 등 불량국가로 분류한 국가에 의한 국지전 발생 가능성이 높아졌다는 국제 전략적 상황 인식이 도사리고 있다.

이러한 새로운 국제적 안보위기를 대처하기 위한 방안으로 미국은 MD를 추진하였다.

초기단계에서는 미국 본토를 방어하는 NMD보다는 해외 주둔 미군과 동맹국 보호에 중점을 둔 ‘전역(戰域) 미사일 방어체제(TAD)'에 초점이 맞추어졌다.

불량국가들이 소련과는 달리 미국을 사정권에 둘 수 있는 대륙 간 탄도 미사일(ICBM)을 보유하지 못한 것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미국이 TMD를 추진한 배경에는 미소 양극체제가 해체된 공백을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로 메우려는 목적도 있다.

또한 냉전 종식으로 미군이 철수하는 상황에서 동맹과 맺은 안보조약에 대한 신뢰성을 유지하고 더불어 ‘원거리 주둔’의 효과를 누리기 위한 목적 역시 갖고 있다.

클린턴 행정부는 레이건과 아버지 부시 등 공화당 행정부에 의해 수립된 이 구상에 미온적이었다. 수백 억 달러가 소요될 뿐만 아니라 그 효용성에 의문이 제기된 탓이다.

이러한 MD 구상에 모멘텀을 제공한 것은 1998년 8월 북한의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였다.

미국은 대포동 1호가 일본 열도를 넘어 태평양 상에 떨어지자 경악했고 이는 클린턴 행정부에 TMD와 함께 본토를 방위하는 NMD를 추진하도록 하는 압박 요인으로 작용했다.

당시 'NMD 전도사'는 '아들 부시(조지 W 부시 대통령)' 1기 집권 기간 국방장관을 지내게 되는 도널드 럼스펠드였다.

결국 클린턴 대통령은 북한 대포동 미사일 1호의 발사가 있은지 10개월 뒤 NMD 법안에 서명한 것이다.

아들 부시 행정부가 들어선 뒤 TMD와 NMD의 구별을 없애고 MD로 개념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같이 개념통합이 이루어진 배경으로 부시 행정부가 집권 초기 중국을 미국 이익에 가장 위협적인 존재로 규정한 사실을 들 수 있다. 중국을 가상적으로 할 경우 TMD와 NMD가 중첩되기 때문이다.

워싱턴 타임스가 보도한 바에 따르면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 2호 실험발사 움직임을 보인 이후 미국 MD는 실험 모드에서 실전 모드로 전환했다.

1998년 북한은 대포동 1호 미사일 발사로 민주당 정권 아래서 사위어져 가던 MD구상을 기사회생시켰다.

9.11 테러로 중국과 전략적 '오월동주'가 계속되면서 부시 행정부의 MD 추진력은 집권 초기 의욕에 비해 크게 낮아졌다.

그러나 북한 핵실험 성공 및 장거리 미사일 연속적인 발사 실험과 이란 핵개발 추진으로 미국 MD는 더는 '되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접어들었다.

따라서 미국 군산복합체에게 만큼은 북한 정권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여전히 ‘존속할 가치’가 있는 존재다. 물론 ‘도발 관리’가 이루어진다는 전제가 있어야 하겠지만 말이다.

[書中一滴] 중국의 MD 시각 2003/07/14 15:31

화전(和戰) 양상의 중·미 관계 (2) 2001/06/27 18:22

김정일의 2차 방중과 중국의 대미 응전전략 2001/02/05 11:25

1951년 = 유엔 주재 소련대표 야코프 말리크가 한국전 휴전을 제의했다. 한국전 발발 1주년을 이틀 앞두고서였다. 그러나 휴전 성립은 2년 이상 더 소모전을 계속한 뒤 이루어졌다.

1952년 = 유엔군이 한중 국경지역에 위치한 수풍댐을 폭격했다.

1952년 6월23일 ‘거(莒)땅에 있음을 잊지 말라(毋忘在莒)’라는 장제스 총통의 제자(題字)가 진먼다오(金門島) 타이우산(太武山)산에 새겨졌다.

이 글귀는 장제스가 진먼다오 수비사령관 후롄(胡璉)의 요청에 따라 진먼다오 수비대 장병의 사기진작을 위해 써준 것이었다.

글귀는 사기 82권 전단전(田單傳)에 나온 고사를 배경으로 하고 있다. 전국시대 제(齊)나라는 연(燕)나라의 일제 공격을 받아 72개 성 중 묵(墨)과 거(莒)성 등 2개성을 제외하고는 모두 빼앗겼다.

제나라는 거성을 반격의 근거지로 삼아 5년의 각고세월 끝에 실지를 회복하였다.

이후 실지 회복에 대한 의지를 드러내는 말로 이 말이 쓰이게 됐다. 대만에서는 이를 남송의 악비(岳飛)가 북벌을 감행하며 내세웠던‘내게 산하를 돌려 달라(還我河山)’는 글귀와 함께 본토 수복의 슬로건으로 활용하였다.

장제스는 대만으로 옮겨온 이후 사망할 때까지 적어도 매년 한 차례씩 진먼다오를 방문했으나 그의 아들 장징궈(蔣經國)는 총통 재임 중 한두 차례 방문했을 뿐이며 리덩후이(李登輝)와 천수이볜(陳水扁)은 전혀 찾지 않았다.

‘무망재거’는 진먼다오 특산물인 고량주의 상표명이기도 하다.

추억...장제스(蔣介石)와 무망재거(毋忘在莒) 2004/12/01 21:52

장제스가 이 휘호를 쓰기 6년 전인 1946년 6월23일 장제스는 30만 대군을 동원, 공산당 세력이 장악하던 중원(中原)지역, 즉 중원해방구에 대해 전면적인 공격을 감행했다.

국공내전의 본격적인 시작이었다. 중원지구에 대한 공격과 함께 화북(華北), 화동(華東), 진수(晋綏). 동북(東北) 지구에 대한 진공도 개시했다. 8월2일에는 옌안(延安)에 대한 폭격도 시작했다.

국공내전 초기 장제스의 병력은 정규군 200만명을 포함, 총 430만 명이었으며 3억 이상의 인구를 통제하고 있었다. 또한 미국이 제공한 전투기, 탱크, 그리고 대포 등으로 무장하고 있었다.

반면 중국공산당의 병력은 120만명이었으며 통제 인구는 1억명이었고 대부분의 병력이 소총에 의지하는 등 국민당에 비해 월등히 낮은 무장 수준이었다.

내전 개시 후 국민당군은 앞서 동북지구로 파견한 7개 사단 20만 명 외에 다음 같이 병력을 배치하였으며 이는 전선 병력의 80%를 동원한 것이었다.

- 중원지구 포위 30만명

- 장쑤(江蘇), 안후이(安徽)와 산둥(山東) 지구 진공 58개 여단 46만명

- 진기노예(晋冀魯豫)지구 진공 28개 여단 24만명

- 진찰기(晋察冀) 지구 진공 18개 여단 16만명

- 진수(晋綏)지구 진공 20여단 9만명

- 섬감닝(陝甘寧)변경 지구 진공 19개 여단 15만명

- 광둥(廣東) 유격지구와 하이난다오(海南島) 진공 9개 여단 7만 명

중국공산당의 군대가 이 같은 국민당의 대군을 패배시킨 것에 대해 마오쩌둥(毛澤東)의 탁월한 군사재능과 공산군의 전투능력과 높은 사기 및 민중의 지지가 부각돼왔다. 반면 상대적으로 국민당 군대는 무능, 부패의 대명사로 각인되어 왔다.

그러나‘대륙의 딸’ 작가인 장룽(張戎 : 장융)은 남편 존 핼러데이(Jhon Halliday)와 함께 2005년 펴낸 ‘마오쩌둥 : 알려지지 않은 이야기들(MAO TSE TUNG : The Unknown Story)’에서 이는 승자에게 부여된 신화일 뿐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는 장제스의 내전 실패 근본적 원인은 미국 압력에 굴복, 초기단계에서 휴전함으로써 동북지구로 밀려난 공산군이 소련군에 의해 최신식 무기로 무장할 수 있는 시간을 제공하고 또 국민당군 최고위 지도부 내 공산당 프락치가 전략을 오도하였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극히 비판적인 시각 아래 쓰인 마오쩌둥 전기는 2006년 4월 ‘까치’ 사가 번역 출간했다.

1884년 = 중국 청나라와 프랑스 간 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은 베트남에 대한 청의 종주권을 놓고 벌어진 전쟁이었다.

프랑스는 1862년 사이공조약을 통해 베트남 남부 6성(코친차이나 전역)을 병합하고 캄보디아도 보호국으로 삼았다.

1874년에는 베트남을 압박, 통킹지방을 프랑스인에게 개방하게 하여 베트남인과 프랑스인 사이에 종종 충돌이 일어났다. 이에 대해 프랑스는 H. 리비에르를 파견하여 하노이를 점령하였다.

1883년 아르망조약에서 프랑스가 베트남을 보호국으로 하면서 베트남 종주국 청나라와 프랑스의 관계는 점차 악화되고, 1884년 랑손에서 청과 프랑스 병사의 충돌이 벌어진 끝에 로 이해 8월 하순부터 전면적인 전쟁이 벌어졌다.

청군은 중국·베트남 국경에서 프랑스군 점거지를 탈환하는 등 선전을 거듭하였으나, 프랑스는 우수한 해군력으로 청나라 남양함대(南洋艦隊)를 괴멸시키고 나아가 대만(臺灣)을 봉쇄하였다.

그 뒤 1885년 3월 프랑스 클레망소 내각의 성립과 함께 화의가 진행되어 6월 청나라 이홍장(李鴻章)과 파토노트르 사이에 천진(天津)조약이 체결되어 베트남은 완전히 프랑스 보호국이 되었다.

베트남에 대한 종주권을 포기한 청나라는 프랑스 보호권을 인정하는 한편 윈난(雲南)을 개방하였다.

마침내 1887년 캄보디아 등과 함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되었지만 베트남의 민족파 세력은 이에 대해 함의제(咸宜帝)를 왕으로 세우고 1888년까지 저항을 계속하였다.

청불전쟁은 10년 후 중국이 조선에 대한 종주권을 놓고 일본과 전쟁을 벌인 것과 닮은꼴 전쟁이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청불전쟁에서 중국의 상대가 서방 제국주의 국가였던데 비해 청일전쟁의 상대는 아시아 국가인 일본이었다는 점이다.

또 하나 다른 점은 프랑스는 청과 벌인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베트남을 식민지로 만든 반면 일본은 러시아와 또 다른 전쟁을 치루고 영국과 미국의 동의를 얻은 뒤에서라야 조선에 대한 배타적 지배권을 확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熙>
우리나라 역사

5·16 쿠데타를 설계한 주렷 김종필 전 총리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충남 부여 출신으로 향년 92세(2018).

박정희 소장을 대통령으로 만들어 1960년대 초 최후빈국의 대한민국이 세계 10위권 국가로 성장하는 토대를 마련한 3공화국 체제의 주춧돌을 쌓도록 하는데 있어 박정희 다음의 공이 큰 인물이다.

1961년부터 1979년까지 군사정부, 3공화국 정부와 유신독재 정권으로 이어지는 박정희 18년 집권 기간 부침은 있었으나 중앙정보부장, 공화당 당의장과 실세총리를 역임하는 등 2인자로 군림했다.

이후 김영삼 그리고 김대중이 대통령이 되는데 결정적 캐스팅 보트 역할을 하였다.

김영삼의 문민정부 시절과 김대중의 국민의 정부 시기(국민의 정부에서는 다시 총리를 하였는데 막강한 실세 총리였다) 한동안 2인자의 역할을 하기도 하였으나 일찌감치 팽 당하였다.

결국 1인자가 되지는 못하였다. 내각제를 통해 1인자가 되레 부단히 노력은 하였으나 건곤일척의 승부수를 던지는 권력게임에서 생래적으로 주사위를 던지는 용기가 마지막 1%가 부족한 데다 하늘도 그를 돕지 않았다.

중국에서 마오쩌둥의 그늘에 가려 1인자가 되지 못한 저우언라이가 '영원한 총리'로 불리는 것처럼 김종필은 그의 이름자를 영문 머리글자로 표기한 JP와 함께 '영원한 2인자'라는 별칭으로 불렸다.

김종필이 타계한 다음날은 1980년 전두환 소장의 신군부 압력으로 이후락과 박종규 등 박정희 정권의 실세들과 함께 모든 공직에서 사퇴한지 38년이 되는 날이다.

이후 김종필은 끝내 1인자는 되지 못했으나 실세 2인자 아니면 정계 파워맨으로 군림하여 '정치 불사조'라는 비아냥거림과 찬탄이 겹친 말을 듣기도 하였다.

2019/06/23 1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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